제1차 랜드 대전 | 랜드 전쟁 第一次ランド大戰 | 大戰爭 First Land War | The Great War of Lan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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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958년 3월 12일 ~ 1963년 11월 30일 (종전 후 D+22978) | |||
장소 | 랜드해협 전역 (포르틸락해협, 랜드해협 중앙 해역, 체르드·웨스타시아·유고랜드 접경 지대) | |||
원인 | 포르틸락해협 통항권 분쟁 열강들의 이권 다툼과 해상 패권 경쟁 민족주의와 식민지 문제의 충돌 | |||
교전국 | 협상국 | 동맹국 | ||
지휘관 | ||||
병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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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영향 | 랜드해협 전역의 막대한 인명·경제적 피해 포르틸락해협 통항 체제의 재확인과 동맹국 군비 제한 사비에트의 동사랜드 상실(1963)과 안토노프 실각(1964)의 배경 식민지 체제의 약화와 셀레스티아 독립(1965) 협상국 전시 연합의 상설화, NLTO 창설(1969) 해협 남부 공산화와 제2차 랜드 전쟁의 씨앗 | |||
피해규모 | ||||
1. 개요 [편집]
1차 랜드 전쟁(第一次ランド大戰, First Land War)은 1958년 3월 12일부터 1963년 11월 30일까지 랜드해협 전역에서 플로렌시아·루이나·웨스타시아·빌베른의 협상국과 사비에트·고랜드·체르드·라 마베라 연방의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제1차 랜드 대전 또는 대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콘스탄티노폴의 포르틸락해협과 랜드해협 중앙 해역의 통항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1957년 콘스탄티노폴 조차국 회의가 비조차국 군함과 전략물자의 해협 통과를 제한하는 항행 규칙을 채택하자, 해협 이북의 내해에 자리한 체르드와 라 마베라, 그리고 이들에게 무기를 보내던 사비에트가 강하게 반발했다. 1958년 3월 9일 포르틸락해협 입구에서 루이나 해군이 사비에트 수송 선단을 검문하려다 체르드 해안포대와 교전한 포르틸락 사건이 일어났고, 사흘 뒤 양 진영이 서로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은 랜드해협 전역으로 번졌다.
전쟁은 5년 8개월 동안 체르드 전선, 북동 전선, 남부 전선, 그리고 랜드해협의 바다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개전 초 동맹국은 유고랜드 대부분을 점령하고 체르드 국경에서 공세를 펼쳤으나, 루이나 해군이 포르틸락해협과 중앙 해역을 장악하면서 해협 북부의 체르드·라 마베라와 해협 남부의 사비에트·고랜드는 바다로 갈라진 채 따로 싸워야 했다. 1961년 이후 협상국이 반격에 나서고, 사비에트가 청평과의 결별과 동사랜드 봉기로 후방에서 흔들리자 동맹국은 차례로 휴전을 요청했다. 1963년 11월 30일 델라웨어령 헨셀슈타인의 오로아 특별시에서 오로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영토 변경 없이 동맹국의 배상과 군비 제한으로 마무리되었다.
양측을 합쳐 약 1,6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랜드해협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었다. 함께 싸운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은 1969년 NLTO를 창설해 전시 연합을 상설 동맹으로 굳혔고,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막힌 사비에트는 1963년 이후 해협 남부에서 공산 정권 수립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전쟁이 해결하지 못한 해협 문제와 동맹국의 불만은 10년 뒤 2차 랜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콘스탄티노폴의 포르틸락해협과 랜드해협 중앙 해역의 통항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1957년 콘스탄티노폴 조차국 회의가 비조차국 군함과 전략물자의 해협 통과를 제한하는 항행 규칙을 채택하자, 해협 이북의 내해에 자리한 체르드와 라 마베라, 그리고 이들에게 무기를 보내던 사비에트가 강하게 반발했다. 1958년 3월 9일 포르틸락해협 입구에서 루이나 해군이 사비에트 수송 선단을 검문하려다 체르드 해안포대와 교전한 포르틸락 사건이 일어났고, 사흘 뒤 양 진영이 서로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은 랜드해협 전역으로 번졌다.
전쟁은 5년 8개월 동안 체르드 전선, 북동 전선, 남부 전선, 그리고 랜드해협의 바다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개전 초 동맹국은 유고랜드 대부분을 점령하고 체르드 국경에서 공세를 펼쳤으나, 루이나 해군이 포르틸락해협과 중앙 해역을 장악하면서 해협 북부의 체르드·라 마베라와 해협 남부의 사비에트·고랜드는 바다로 갈라진 채 따로 싸워야 했다. 1961년 이후 협상국이 반격에 나서고, 사비에트가 청평과의 결별과 동사랜드 봉기로 후방에서 흔들리자 동맹국은 차례로 휴전을 요청했다. 1963년 11월 30일 델라웨어령 헨셀슈타인의 오로아 특별시에서 오로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영토 변경 없이 동맹국의 배상과 군비 제한으로 마무리되었다.
양측을 합쳐 약 1,6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랜드해협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었다. 함께 싸운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은 1969년 NLTO를 창설해 전시 연합을 상설 동맹으로 굳혔고,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막힌 사비에트는 1963년 이후 해협 남부에서 공산 정권 수립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전쟁이 해결하지 못한 해협 문제와 동맹국의 불만은 10년 뒤 2차 랜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2. 명칭 [편집]
전쟁 당시 협상국의 정부 문서와 언론은 이 전쟁을 주로 랜드 전쟁 또는 대전쟁(The Great War of Land)이라 불렀다. 랜드해협의 열강이 거의 모두 참전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라는 서수는 1973년 2차 랜드 전쟁이 일어난 뒤에 붙었으며, 오늘날에는 제1차 랜드 대전이라는 이름이 가장 널리 쓰인다.
전쟁의 발단이 된 해협의 이름을 따 해협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주로 사비에트와 체르드의 역사서에서 쓰는 표현이다. 이 명칭에는 협상국이 해협을 독점하려다 일으킨 전쟁이라는 시각이 담겨 있어 협상국 쪽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전쟁의 발단이 된 해협의 이름을 따 해협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주로 사비에트와 체르드의 역사서에서 쓰는 표현이다. 이 명칭에는 협상국이 해협을 독점하려다 일으킨 전쟁이라는 시각이 담겨 있어 협상국 쪽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3. 성격 [편집]
1차 랜드 전쟁은 이념 전쟁이 아니라 열강 사이의 세력 전쟁이었다. 동맹국 가운데 공산주의 국가는 사비에트뿐이었고, 체르드는 대통령제 공화국, 라 마베라 연방과 고랜드는 왕국이었다. 협상국 역시 대통령제 공화국인 루이나, 의원내각제 국가인 플로렌시아와 1956년 쿠데타로 들어선 웨스타시아의 군사정권이 한편에 서 있었다. 양 진영을 묶은 것은 체제가 아니라 포르틸락해협과 랜드해협 해로에 걸린 이해관계였다. 1950년대 초까지 사비에트가 루이나·플로렌시아와 함께 라 마베라를 견제했다는 사실은 두 진영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짜였는지를 보여 준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바다의 전쟁이었다. 동맹국은 포르틸락해협 이북의 체르드·라 마베라와 랜드해협 남안의 사비에트·고랜드로 나뉘어 있었고, 두 무리를 잇는 길은 중앙 해역과 포르틸락해협을 지나는 바닷길뿐이었다. 반면 협상국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본토를 중심으로 안쪽 연락선을 쥐고 있었다. 개전 직후 루이나 해군이 해협과 중앙 해역을 장악하자 동맹국은 끝내 하나의 전쟁을 치르지 못했고, 이 지리적 분단이 전쟁의 승패를 사실상 결정했다.
또한 1차 랜드 전쟁은 참전국 대부분이 경제와 사회를 전쟁에 맞추어 재편한 총력전이었다. 플로렌시아는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까지 동원했고, 웨스타시아는 괴뢰국 유고랜드에서 병력을 징집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해협 남부가 차례로 공산화되면서 후대에는 이 전쟁을 해협 냉전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생겼지만, 전쟁 당시에는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대결로 인식되지 않았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바다의 전쟁이었다. 동맹국은 포르틸락해협 이북의 체르드·라 마베라와 랜드해협 남안의 사비에트·고랜드로 나뉘어 있었고, 두 무리를 잇는 길은 중앙 해역과 포르틸락해협을 지나는 바닷길뿐이었다. 반면 협상국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본토를 중심으로 안쪽 연락선을 쥐고 있었다. 개전 직후 루이나 해군이 해협과 중앙 해역을 장악하자 동맹국은 끝내 하나의 전쟁을 치르지 못했고, 이 지리적 분단이 전쟁의 승패를 사실상 결정했다.
또한 1차 랜드 전쟁은 참전국 대부분이 경제와 사회를 전쟁에 맞추어 재편한 총력전이었다. 플로렌시아는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까지 동원했고, 웨스타시아는 괴뢰국 유고랜드에서 병력을 징집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해협 남부가 차례로 공산화되면서 후대에는 이 전쟁을 해협 냉전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생겼지만, 전쟁 당시에는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대결로 인식되지 않았다.
4. 배경 [편집]
상세 내용은 1차 랜드 전쟁/배경 문서 참고.
포르틸락해협은 랜드해협 북부의 내해와 중앙 해역을 잇는 유일한 수로다. 19세기 말 빌베른의 콘스탄티노폴 통치가 흔들리자 루이나·플로렌시아·체르드를 비롯한 아홉 개 나라가 도시에 조차지를 두었고, 해협의 항만과 수로는 사실상 조차국들이 관리했다. 1945년 콘스탄티노폴이 독립한 뒤에도 이 구조는 바뀌지 않았으며, 1956년 스타투드라 정권은 만료를 앞둔 조차 계약을 일괄 50년 연장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랜드해협의 세력 관계는 빠르게 바뀌었다. 1949년 수립된 사비에트는 소련, 청평과 손잡고 군사력을 키웠고, 1957년 12월에는 첫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렸다. 같은 해 루이나는 하쿠센 조약으로 북산을 영향권에 넣었다. 1957년 9월 조차국 회의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주도로 비조차국 군함의 해협 통과를 사전 통보제로 묶고 전략물자를 검문할 수 있게 한 해협 항행 규칙을 채택하자, 사비에트가 체르드와 라 마베라로 보내던 무기 수송로가 막혔다. 체르드는 조차국 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졌으나 다수결에 밀렸고, 같은 해 12월 사비에트·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는 4국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1958년 1월 9일 웨스타시아가 유고랜드를 괴뢰국으로 만들면서 해협 남부에서도 긴장이 높아졌다. 사비에트와 고랜드 사이에 협상국 쪽 괴뢰국이 들어선 셈이었다. 두 달 뒤인 3월 9일 해협 항행 규칙에 따른 사전 통보 없이 포르틸락해협에 들어서려던 사비에트 수송 선단에 루이나 구축함이 정선을 요구하며 경고 사격을 하자, 해협 연안의 체르드 해안포대가 루이나 함정에 포격을 가했다. 루이나는 체르드에 48시간 기한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체르드가 이를 거부하자 3월 12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5. 교전 세력 [편집]
상세 내용은 1차 랜드 전쟁/교전 세력 문서 참고.
협상국은 하나의 조약으로 묶인 동맹이 아니라 루이나·플로렌시아의 해군 협력, 1958년 루이나·빌베른·북산의 랜드 안보 3국 동맹, 플로렌시아와 웨스타시아의 상호방위 협정 같은 개별 협정의 묶음이었다. 협상국을 이끈 나라는 약 500만 명을 동원한 플로렌시아였다. 앙드레 뒤몽 총리의 전시 내각은 1958년 5월 설치된 협상국 최고전쟁회의에서 공동 작전 계획을 주도했고, 해상 작전은 랜드해협 최강의 함대를 보유한 루이나 해군이 맡았다.
동맹국은 1957년 12월의 4국 상호원조 조약으로 결속했다. 가장 큰 전력은 약 500만 명을 동원한 사비에트였으나, 해협 북부와 남부로 나뉜 지리 때문에 통합 지휘 체계는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각국은 사실상 자기 전선에서 따로 싸웠고, 사비에트가 생산한 무기는 해협이 봉쇄된 뒤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 거의 닿지 못했다.
5.1. 비교전국의 관여 [편집]
소련은 1950년 사비에트와 맺은 동맹 조약에 따라 무기와 연료, 군사고문단을 보냈으나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았다. 1960년 청평의 지원이 끊긴 뒤에는 소련의 원조가 사비에트 전쟁 경제를 떠받치는 거의 유일한 외부 공급원이 되었다.
청평은 1956년 청소합작 협정 이후 사비에트의 차관과 기술을 받는 대가로 곡물과 원자재를 보냈고, 대약진 운동으로 국내 식량 사정이 악화되던 1958~1959년에도 수출을 이어 갔다. 그러나 1959년부터 사비에트가 원조를 줄이고 1960년 기술자를 철수시키면서 두 나라는 결별했다. 1961년부터 청평은 오히려 동사랜드 인민적군에 무기를 보내 사비에트의 후방을 흔들었다.
북산은 1957년 하쿠센 조약과 1958년 랜드 안보 3국 동맹에 따라 협상국의 후방 기지 역할을 맡았다. 북산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지만 호라쿠 만을 비롯한 항만과 조선소를 루이나 함대의 수리·보급 거점으로 내주었고, 협상국에 군수 물자를 공급했다.
동사랜드 인민적군은 1951년 이후 사비에트의 동사랜드 자치공화국에서 무장 항전을 이어 온 세력이었다. 협상국은 사비에트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1960년 무렵부터 빌베른을 거치는 해상 경로로 인민적군에 무전기와 의약품, 자금을 몰래 보냈다. 청평의 무기 지원과 맞물린 이 지원은 1961~1962년 건기 공세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비에트는 1962년 11월 정전에 이어 1963년 3월 크라슬리스크 조약으로 동사랜드의 분리를 승인했다.[4]
청평은 1956년 청소합작 협정 이후 사비에트의 차관과 기술을 받는 대가로 곡물과 원자재를 보냈고, 대약진 운동으로 국내 식량 사정이 악화되던 1958~1959년에도 수출을 이어 갔다. 그러나 1959년부터 사비에트가 원조를 줄이고 1960년 기술자를 철수시키면서 두 나라는 결별했다. 1961년부터 청평은 오히려 동사랜드 인민적군에 무기를 보내 사비에트의 후방을 흔들었다.
북산은 1957년 하쿠센 조약과 1958년 랜드 안보 3국 동맹에 따라 협상국의 후방 기지 역할을 맡았다. 북산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지만 호라쿠 만을 비롯한 항만과 조선소를 루이나 함대의 수리·보급 거점으로 내주었고, 협상국에 군수 물자를 공급했다.
동사랜드 인민적군은 1951년 이후 사비에트의 동사랜드 자치공화국에서 무장 항전을 이어 온 세력이었다. 협상국은 사비에트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1960년 무렵부터 빌베른을 거치는 해상 경로로 인민적군에 무전기와 의약품, 자금을 몰래 보냈다. 청평의 무기 지원과 맞물린 이 지원은 1961~1962년 건기 공세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비에트는 1962년 11월 정전에 이어 1963년 3월 크라슬리스크 조약으로 동사랜드의 분리를 승인했다.[4]
6. 전개 [편집]
상세 내용은 1차 랜드 전쟁/전개 문서 참고.
개전과 초기 공세 (1958) - 개전 직후인 1958년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포르틸락 해전에서 루이나 해군은 체르드 함대를 해협 이북으로 몰아내고 해협을 장악했다. 지상에서는 동맹국이 먼저 움직였다. 체르드군은 플로렌시아와 루이나의 국경을 향해 공세를 펼쳤으나 벨레 강 선에서 저지되었고, 라 마베라군은 웨스타시아로 진격했다. 해협 남부에서는 사비에트군과 고랜드군이 동서 양쪽에서 유고랜드로 밀고 들어가 6월까지 해안 일부를 제외한 국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7월 중앙해 해전에서 사비에트 수상 함대가 패하면서 동맹국의 남북 연결은 완전히 끊어졌다.
교착과 소모전 (1959~1960) - 전선은 1959년 들어 고착되었다. 체르드 전선에서는 참호와 요새선을 사이에 둔 진지전이 이어졌고, 바다에서는 사비에트 잠수함이 협상국 상선을 노리는 통상파괴전을 벌였다. 1959년 3월 콘스탄티노폴에서 혁명이 일어나 6월 모든 조차지가 회수되자, 협상국은 해협 연안의 거점을 잃고 바다 위에서 봉쇄를 이어 가야 했다. 사비에트는 콘스탄티노폴의 새 정부에 군사고문단과 기술자를 보냈으나, 같은 시기 청평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후방의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
협상국의 반격 (1961~1962) - 1961년 4월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 연합군은 유고랜드 해안에 대규모 상륙을 감행한 남풍 작전으로 남부 전선의 균형을 뒤집었고, 9월 플로렌시아군이 주도한 추분 공세는 벨레 강 선의 교착을 깨고 국경 지대를 되찾은 뒤 전선을 체르드 영내로 밀어 올렸다. 1962년에는 웨스타시아군이 반격에 나서 라 마베라군을 국경 밖으로 밀어냈다. 같은 시기 동사랜드 인민적군의 건기 공세로 사비에트는 병력을 동부로 돌려야 했다. 1962년 10월 28일 사비에트가 고고도 핵실험을 실시하자 협상국은 사비에트 본토로 진격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종전 (1963) - 1963년 3월 사비에트는 크라슬리스크 조약으로 동사랜드의 분리를 승인했고, 흉작까지 겹치면서 전쟁을 이어 갈 여력을 잃었다. 5월 체르드가 단독 휴전을 요청했고, 해협 북부에서 고립된 라 마베라가 6월에 뒤를 이었다. 8월 20일 사비에트와 고랜드가 휴전에 합의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9월 헨셀슈타인의 오로아 특별시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고, 11월 30일 조약이 서명되면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7. 전쟁의 양상 [편집]
해협 봉쇄 - 협상국이 포르틸락해협을 장악하자 해협 이북의 내해는 거대한 봉쇄 구역이 되었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연료와 식량, 무기 수입이 막혀 중립국 델라웨어를 거치는 육로에 의존해야 했고, 협상국은 델라웨어에 이 통과 무역을 줄이라는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봉쇄가 길어질수록 두 나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빠르게 떨어졌다.
통상파괴전 - 수상 함대로 루이나 해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사비에트는 1959년부터 잠수함으로 중앙 해역의 협상국 상선을 공격했다. 협상국은 호송 선단 체계를 도입하고 북산과 빌베른의 항만을 거점으로 대잠 초계를 강화했으며, 1960년 말부터 상선 피해는 눈에 띄게 줄었다.
진지전 - 체르드 전선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양측이 참호와 콘크리트 요새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소모전의 무대였다. 대규모 포격과 돌격이 되풀이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했고, 플로렌시아가 입은 약 38만 명의 인명 손실도 대부분 이 전선에서 나왔다.
총동원과 식민지 - 참전국들은 징병 연령을 넓히고 산업을 군수 중심으로 재편했다. 플로렌시아는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을 대규모로 동원했는데, 이는 전쟁 뒤 식민지 독립운동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비에트는 전쟁과 동시에 루이나와의 우주경쟁도 치러야 했고, 제한된 자원을 두 곳에 나누어 쓰는 부담을 안았다.
통상파괴전 - 수상 함대로 루이나 해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사비에트는 1959년부터 잠수함으로 중앙 해역의 협상국 상선을 공격했다. 협상국은 호송 선단 체계를 도입하고 북산과 빌베른의 항만을 거점으로 대잠 초계를 강화했으며, 1960년 말부터 상선 피해는 눈에 띄게 줄었다.
진지전 - 체르드 전선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양측이 참호와 콘크리트 요새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소모전의 무대였다. 대규모 포격과 돌격이 되풀이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했고, 플로렌시아가 입은 약 38만 명의 인명 손실도 대부분 이 전선에서 나왔다.
총동원과 식민지 - 참전국들은 징병 연령을 넓히고 산업을 군수 중심으로 재편했다. 플로렌시아는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을 대규모로 동원했는데, 이는 전쟁 뒤 식민지 독립운동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비에트는 전쟁과 동시에 루이나와의 우주경쟁도 치러야 했고, 제한된 자원을 두 곳에 나누어 쓰는 부담을 안았다.
8. 전시 정치 [편집]
플로렌시아에서는 앙드레 뒤몽 총리가 개전 직후 전시 내각을 꾸려 전쟁을 지휘했다. 정부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대폭 올리고 물가와 임금을 통제했으며, 1956년 이후 추진해 온 수출 산업은 성장을 멈추었다. 전쟁 막바지에는 장기전에 지친 여론이 조기 강화를 요구했지만, 뒤몽은 협상국의 결속을 이유로 전쟁을 끝까지 이끌었다.
루이나에서는 전쟁 도중인 1961년 로런스 D. 페닝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헨리 모리슨 대통령이 취임했다. 두 행정부 모두 해군 증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적국 사비에트가 공산국가였던 탓에 국내에서는 반공 분위기가 짙어졌고, 1957년 승인된 제방 계획에 따라 1958년 결성된 극우 조직 '공화국의 방패'도 이 분위기 속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사비에트에서는 세르게이 안토노프 서기장과 니키타 인터루쇼프 총리의 집단지도 체제가 전쟁을 이끌었다. 전쟁 비용에 우주 개발 비용, 청평과의 결별, 동사랜드 봉기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정치국 안에서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는 봉쇄로 인한 물자 부족이 반정부 시위로 번졌고, 고랜드 왕실은 전쟁 부담을 둘러싸고 부족 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루이나에서는 전쟁 도중인 1961년 로런스 D. 페닝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헨리 모리슨 대통령이 취임했다. 두 행정부 모두 해군 증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적국 사비에트가 공산국가였던 탓에 국내에서는 반공 분위기가 짙어졌고, 1957년 승인된 제방 계획에 따라 1958년 결성된 극우 조직 '공화국의 방패'도 이 분위기 속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사비에트에서는 세르게이 안토노프 서기장과 니키타 인터루쇼프 총리의 집단지도 체제가 전쟁을 이끌었다. 전쟁 비용에 우주 개발 비용, 청평과의 결별, 동사랜드 봉기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정치국 안에서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는 봉쇄로 인한 물자 부족이 반정부 시위로 번졌고, 고랜드 왕실은 전쟁 부담을 둘러싸고 부족 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9. 민간인 피해 [편집]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약 500만 명 가운데 민간인은 약 170만 명으로 추산된다. 협상국 쪽이 약 70만 명, 동맹국 쪽이 약 100만 명이다. 정확한 통계는 남아 있지 않으며, 특히 점령지와 봉쇄 지역의 수치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크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동맹국에 점령된 유고랜드였다. 점령군은 저항 세력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을 불태웠고, 주민들을 도로와 요새 건설에 강제로 동원했다. 웨스타시아 역시 괴뢰국 정부를 통해 유고랜드 청년들을 징집했기 때문에, 유고랜드 사람들은 양쪽 군대 모두에 동원되는 처지였다.
해협 이북의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는 봉쇄로 식량 수입이 끊기면서 1960년부터 1962년까지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기근이 발생했다. 체르드 전선과 가까운 플로렌시아·루이나의 국경 지대, 사비에트 해안과 마주한 빌베른 남부 해안의 도시들도 포격과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동맹국에 점령된 유고랜드였다. 점령군은 저항 세력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을 불태웠고, 주민들을 도로와 요새 건설에 강제로 동원했다. 웨스타시아 역시 괴뢰국 정부를 통해 유고랜드 청년들을 징집했기 때문에, 유고랜드 사람들은 양쪽 군대 모두에 동원되는 처지였다.
해협 이북의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는 봉쇄로 식량 수입이 끊기면서 1960년부터 1962년까지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기근이 발생했다. 체르드 전선과 가까운 플로렌시아·루이나의 국경 지대, 사비에트 해안과 마주한 빌베른 남부 해안의 도시들도 포격과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10. 강화 [편집]
상세 내용은 오로아 조약 문서 참고.
1963년 8월 20일 모든 전선에서 휴전이 성립하자, 9월 16일 중립국 델라웨어의 랜드해협 식민정부 소재지인 헨셀슈타인의 수도 오로아 특별시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다. 협상 과정에서 플로렌시아와 웨스타시아는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국경 지대를 떼어 받기를 원했으나, 루이나는 사비에트의 핵실험 이후 확전 위험을 경계하며 영토 변경 없이 동맹국의 군사력을 묶어 두는 쪽을 주장했다. 결국 루이나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1963년 11월 30일 서명된 오로아 조약은 1958년 3월 12일 이전의 국경을 그대로 되돌렸다. 대신 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는 15년에 걸쳐 전쟁 배상금을 분할 지급하기로 했고, 사비에트는 격침된 협상국 상선에 대한 보상금을 내기로 했다. 체르드는 포르틸락해협 연안의 요새를 해체하고 해군 규모를 제한받았으며, 사비에트는 랜드해협 중앙 해역에 배치할 수 있는 수상함의 톤수에 상한을 받아들였다.
해협 조항은 평시 상선의 자유 통항을 보장하면서도 군함에 대해서는 1957년 항행 규칙의 사전 통보제를 그대로 확인했다. 그러나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었던 콘스탄티노폴은 자국 주권이 걸린 해협 문제를 외국들이 결정했다며 해협 조항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1960년대 내내 해협의 불씨로 남았다.
11. 결과와 영향 [편집]
상세 내용은 1차 랜드 전쟁/영향 문서 참고.
협상국 가운데 가장 큰 이득을 본 나라는 루이나였다. 루이나는 전쟁을 거치며 랜드해협의 제해권을 확고히 쥐었고, 1950년대 후반부터 다져 온 지역 패권을 굳혔다. 플로렌시아는 협상국을 이끈 대가로 막대한 재정 부담과 식민지 체제의 약화를 떠안았으며, 1965년 셀레스티아의 독립으로 식민제국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웨스타시아의 요크 정권은 승전을 발판으로 권력을 굳히고 유고랜드에 대한 지배를 유지했다.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은 1969년 4월 4일 북랜드해 조약에 서명해 NLTO를 창설했다.
사비에트는 동사랜드를 잃고 청평과 결별한 데다 1963년 흉작까지 겹치며 안팎으로 위기를 맞았다. 1964년 10월 안토노프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해임되었고, 레오니트 브레자코프가 뒤를 이었다. 해협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자 사비에트는 해협 남부의 공산 세력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해협 남부의 여러 나라가 차례로 공산화되었다. 이로써 해협을 사이에 둔 대치선이 굳어졌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배상금과 군비 제한, 봉쇄의 후유증 속에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정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좌파 세력이 급성장했고, 이는 두 나라의 정치 격변으로 이어졌다. 고랜드 왕실 역시 전쟁으로 권위를 크게 잃었다.
오로아 조약은 전쟁의 원인이 된 해협 문제를 콘스탄티노폴을 뺀 채 봉합했다. 해협을 둘러싼 갈등은 1960년대 내내 이어졌고, 1970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으로 폭발했다. 1차 랜드 전쟁이 남긴 해협 문제와 동맹국의 불만, 새로 굳어진 해협 남북의 대치선은 1973년 2차 랜드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12. 평가 [편집]
1차 랜드 전쟁에서 협상국이 이긴 가장 큰 이유는 바다를 지배했다는 데 있다. 동맹국은 병력 규모에서 협상국에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해협 북부와 남부로 갈라진 채 끝내 힘을 합치지 못했다. 전쟁사 연구자들은 1958년의 포르틸락 해전과 중앙해 해전을 사실상 전쟁의 향방을 가른 전투로 꼽는다.
오로아 조약의 현상 유지 방식은 평가가 엇갈린다. 핵무기를 가진 사비에트와의 확전을 피하고 영구 점령에 따른 부담을 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콘스탄티노폴의 주권 문제와 동맹국의 불만을 그대로 남겨 두어 다음 전쟁의 불씨를 키웠다는 비판도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1차와 2차 랜드 전쟁을 하나의 긴 전쟁이 10년의 휴지기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나라마다 다르다. 협상국 국가들은 이 전쟁을 해로의 자유를 지킨 전쟁으로 기억하지만, 사비에트와 체르드의 역사서는 협상국이 해협을 독점하려다 일으킨 '해협 전쟁'으로 서술한다. 동사랜드에서는 이 시기를 독립 투쟁의 마지막 국면으로 기억할 뿐, 랜드 전쟁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
오로아 조약의 현상 유지 방식은 평가가 엇갈린다. 핵무기를 가진 사비에트와의 확전을 피하고 영구 점령에 따른 부담을 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콘스탄티노폴의 주권 문제와 동맹국의 불만을 그대로 남겨 두어 다음 전쟁의 불씨를 키웠다는 비판도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1차와 2차 랜드 전쟁을 하나의 긴 전쟁이 10년의 휴지기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나라마다 다르다. 협상국 국가들은 이 전쟁을 해로의 자유를 지킨 전쟁으로 기억하지만, 사비에트와 체르드의 역사서는 협상국이 해협을 독점하려다 일으킨 '해협 전쟁'으로 서술한다. 동사랜드에서는 이 시기를 독립 투쟁의 마지막 국면으로 기억할 뿐, 랜드 전쟁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
13. 주요 연표 [편집]
시기 | 사건 |
1945년 6월 2일 | 콘스탄티니예 양도 협정 체결 |
1949년 10월 7일 | 사비에트 연방 수립 |
1952년 | 고랜드, 라 마베라로부터 독립 |
1956년 | 콘스탄티노폴 스타투드라 정권, 조차 계약 일괄 50년 연장 |
1957년 9월 | 조차국 회의, 해협 항행 규칙 채택 |
1957년 12월 | 사비에트·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 4국 상호원조 조약 체결 |
1958년 1월 9일 | 웨스타시아, 유고랜드를 괴뢰국화 |
1958년 3월 9일 | 포르틸락 사건 |
1958년 3월 12일 | 1차 랜드 전쟁 발발 |
1958년 3월 14일 | 포르틸락 해전 (~3월 16일) |
1958년 5월 | 협상국 최고전쟁회의 설치 |
1958년 6월 | 동맹국, 유고랜드 대부분 점령 |
1958년 7월 | 중앙해 해전 |
1959년 3월 13일 | 콘스탄티노폴 3월 혁명 |
1959년 6월 1일 | 콘스탄티노폴, 조차지 회수령 공포 |
1960년 | 사비에트, 청평에서 기술자 철수 |
1961년 | 헨리 모리슨, 루이나 대통령 취임 / 루이나, 콘스탄티노폴 금수 조치 |
1961년 4월 | 남풍 작전 |
1961년 9월 | 추분 공세 |
1962년 10월 28일 | 사비에트, 고고도 핵실험 |
1962년 11월 | 사비에트–동사랜드 정전 |
1963년 3월 | 크라슬리스크 조약, 동사랜드 분리 |
1963년 5월 | 체르드, 단독 휴전 |
1963년 6월 | 라 마베라, 휴전 |
1963년 8월 20일 | 사비에트·고랜드 휴전, 전면 휴전 성립 |
1963년 9월 16일 | 오로아 강화 회의 개막 |
1963년 11월 30일 | 오로아 조약 체결, 종전 |
1964년 10월 | 안토노프 실각 |
1965년 | 셀레스티아 독립 |
1969년 4월 4일 | NLTO 창설 |
1973년 7월 14일 | 2차 랜드 전쟁 발발 |
